[특집기획] 월전 장우성의 뜻을 찾다
[특집기획] 월전 장우성의 뜻을 찾다
  • 경기포털뉴스
  • 승인 2022.07.0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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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밭에 길을 묻다, 월전 장우성의 뜻을 찾다

독립운동가 지원한 애국집안…현대 한국미술 이끈 거장, 월전 장우성
장학구 관장, “월전 장우성 선생의 뜻을 이어 한국화 아름다움 알리겠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관장 장학구)은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적인 미술관으로, 월전 선생의 작품세계와 함께 20세기 한국화에 대한 전시, 연구, 교육을 계속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미술관이다. 경기도 이천 설봉호수 내에 자리한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은 이천의 문화적 정체성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고, 시민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고 있다.

이천설봉신문은 문화와 예술이 가진 힘을 믿는다. 이에 본지 창간 21주년을 기념하여 20세기 대한민국 현대 미술계를 대표하는 월전 장우성 선생의 이야기를 특집기획기사로 다룬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시대를 고스란히 나아가야 했던 월전 선생을 기억하고 뜻을 찾을 시간이다. <편집자 주>

월전 장우성 | 백두산천지도(白頭山天池圖) | 1975 | 종이에 수묵채색 | 200×700cm | 국회의사당 소장. [자료제공=이천시립월전미술관]
월전 장우성 | 백두산천지도(白頭山天池圖) | 1975 | 종이에 수묵채색 | 200×700cm | 국회의사당 소장. [자료제공=이천시립월전미술관]

白頭山天池圖
偉哉其容 莊嚴其像
神市在此 倍達發祥 王儉降誕 國基已定
天符三印 燦然有光 雲雨風霜 幾半萬年
永世隆隆 民族表象
  西紀一千九百七十五年己卯九月一日 爲
  大韓民國國會議事堂新築竣工誌禧
  月田張遇聖畵幷記

백두산 천지의 그림
위대하다 그 모습 장엄하다 그 기상
여기가 신시이고 배달의 발상지라.
왕검이 강탄(降誕)하사 나라 기초 세우시어
천부삼인 빛나고 운우풍상 반만년
길이길이 우뚝하여 이 민족의 표상일세.
  1975년 기묘 9월 1일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신축 준공의 복됨을 표한다.
  월전 장우성 그리고 아울러 적다. 

[자료제공=이천시립월전미술관]

● ‘신문인화’ 회화세계를 구축하다
월전 장우성 선생은 현대 한국화의 역사를 살펴볼 때 반드시 언급되는 중심인물이다. 월전 선생이 활동한 20세기는 사회 전반을 비롯해 문화계와 미술계에서도 전면적으로 서구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월전 선생은 변화 속에서 흐름을 읽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한국 미술계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월전 선생은 동양 특유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 조형기법을 적용해 ‘신문인화’의 회화세계를 구축한 장본인이다. 월전 선생은 폭넓은 방식으로 작품세계를 선보였다. 초기에는 미인화와 풍속인물화를 다뤘으나, 이후 간결한 필선을 위주로 한 수묵담채를 선보였다. 절제되고 응축된 선을 사용해 대상의 본질과 형태를 창출하는 동시에 변화감이 풍부하고 활달한 먹의 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주변에는 여백을 배치해 여운을 남겼다. 90년대 이후에는 더욱 깊고 유려한 먹과 선을 사용해 깊은 명상에서 얻어지는 선의 정적과 탈속의 경계를 보였다. 

월전 선생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선비정신은 세심한 포착과 배치 외에도 학문의 깊이에서 기인한다. 월전 선생은 광암 이규현에게 한학을 배웠고, 이당 김은호에게 그림을 익혔다. 그 결과 학문과 예술이 조화를 이룬 경지를 선보이며, 한국 화단에 입지를 굳혀 갔다. 때문에 전통 문인화의 깊은 세계를 내적과 외적으로 일치시킨 마지막 문인화가로 평가받는다. 

월전 장우성 | 오염지대(汚染地帶) | 1979 | 68×60.5cm | 종이에 채색 |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소장. [자료제공=이천시립월전미술관]
월전 장우성 | 오염지대(汚染地帶) | 1979 | 68×60.5cm | 종이에 채색 |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소장. [자료제공=이천시립월전미술관]

人願近代化 那料公害苛
焰風汚大氣 毒流染江河
草木欲摧枯 人畜瀕斃死
吁嗟悔何及 須知自招禍
  己未庚炎月田揮汗

사람들은 근대화를 원했지만 어찌 공해가 무서운 줄 알았으랴.
불 바람은 대기를 더럽히고 독한 오수는 강과 바다를 물들인다.
산천초목은 말라 들어들어 가려 하고 사람과 가축은 죽음에 임박해가는구나.
아아 뉘우친들 무엇하리. 인간이 자초한 재앙인 것을.
  기미년 복중에 월전이 땀을 닦으며

[자료제공=이천시립월전미술관]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장학구 관장은 월전 장우성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미술의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장학구 관장은 월전 장우성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미술의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 독립운동가 도와 애국 또 애국

월전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한학자인 정인보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는 위당 정인보 선생이 월전 장우성의 부친인 일재 장수영 공과 교류하며 보낸 편지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편지에는 소식과 안부를 다정하게 묻는 내용이 담겼다. 

만락헌 장석인 공(월전 장우성 선생의 조부·일재 장수영 공의 부친)은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며,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큰 힘을 보탰다. 애국지사로 독립훈장 애족장에 추서 된 광암 이규현 공을 통해 항일 군자금을 지원했고, 항일의병이 실패한 뒤에도 이규현 공을 비롯해 수많은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이규현 공은 만락헌 가에 머물며 월전 장우성에게 한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3·1 만세운동 다음 해인 1920년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국민들은 일제의 착취를 당하며 이중고를 겪었는데, 장석인 공은 사재를 털어 150여 호에 달하는 인근 빈민을 구제하는 등 국민들을 보호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 인재 육성도 힘쓴 진정한 개척자

월전 선생은 가문의 유지를 이어받았다. 해방과 더불어 일본 화풍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이루고, 순수한 우리나라 문인화를 개척하고자 노력했다. 9회의 국내 개인전 및 5회의 해외 초청 전시회를 통해 한국화의 진정한 모습을 국내를 넘어 세계무대까지 펼쳐 위상을 높였다.

1946년부터 1961년까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 교수를 역임하며 인재 육성에 힘썼다. 이후 1963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워싱턴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65년에는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를 설립해 실기와 동양미술을 지도했다. 귀국 후에는 1971년부터 1974년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 교수를 역임, 1976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장을 수훈했다. 1980년에는 프랑스 정부 초청으로 파리의 세르뉘쉬 미술관에서, 1982년에는 독일 쾰른시립미술관에서 초대 개인전을 가지는 등 세계적인 발자취를 다양하게 남겼다.

● 100원 동전에 담긴 월전의 충무공

100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충무공 이순신의 그림이 바로 월전 선생의 작품이다. 월전 선생은 충무공을 포함해 강감찬 장군·유관순 열사·윤봉길 의사 등 표준 영정 7점을 제작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충무공 이순신 영정>(현충사 소장), <백두산 천지도>(국회의사당), <한국의 성모와 순교복자>(성화3부작/로마 바티칸 교황청박물관), <절규>(국립현대미술관), <노묘(怒猫)>(이천시립월전미술관), <청춘일기>(삼성미술관 리움), <새안(塞雁)>(영국 대영박물관), <홍매>(프랑스 문화성), <회고>(독일 쾰른시립박물관) 등이 있고, 인물화·산수화·화조도·영모도 등을 넘나드는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이런 미술계의 위인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 월전 선생이 화가로 입문하던 시기로 거슬러 간다. 월전 선생은 1930년대 초 조선미술전람회와 서화협회전에 연속 입선했고, 조선미술전람회에 4회 연속 특선해 추천화가가 되는 등 일제강점기 공모전 작품을 출품하며 활동했다. 당시 미술학도에서 화가로 입문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억압받는 시대상에 놓인 유일한 길을 택했을 뿐이다. 해방 직후에는 나라를 위해 조선미술건설본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짓밟힌 나라의 국민으로서 국권을 일으키기 위해 온 힘을 쏟았는데, 돌아온 결과는 허무했다.

● 유작과 소장품 1,532점 기증

그럼에도 월전 선생은 더욱 많은 사람들과 예술의 가치를 향유하기를 원했다. 사재를 사회에 환원하는 뜻을 세워 1989년 월전미술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월전 선생은 자신의 대표 작품과 평생 모은 국내외 가치 있는 미술품 전부를 재단에 기증했다. 이를 토대로 사립 월전미술관이 1991년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에 건립됐다. 

월전 선생은 미술관의 규모와 역량을 확충하고, 공익적인 성격을 보다 뚜렷하게 만들고자 했다. 2005년 월전 선생의 작고 이후 유족들은 그 유지를 받들어 월전 선생의 유작과 고미술 소장품 1,532점을 이천시에 기증했다. 가치를 환산하면 천문학적인 숫자이다. 이를 바탕으로 2007년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이 개관했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장학구 관장은 부친인 월전 장우성 선생의 뜻을 이어 한국미술의 발전을 위한 연구, 전시, 교육 등을 계속하고 있다.

장학구 관장은 “월전 선생은 전통의 중요성과 가치를 깨닫고 한국화를 통해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하셨고, 또한 현대 한국미술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셨다”며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은 앞으로도 월전 선생의 뜻을 이어 수준 높은 한국화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미술을 통해 전통의 가치를 되새기는 한편 이천의 문화적 역량을 드높이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숙자 발행인 / 김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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